스무 살 무렵 읽었고 작년에는 어린이 책으로 읽기도 했던 “백범일지”를 얼마 전 또 읽었습니다.
여전히 재밌더군요.
아니 단순한 재미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감동의 물결이 가슴을 적셨다고 해야 될까요.
사람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저는 먼저 출판사를 보고 그 뒤에 저자와 책의 장정을 봅니다.
80년대 전태일 평전을 필두로 의식 있는 책들을 꾸준하게 펴냈던 돌베게.
주해를 단 도진순이란 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고르는 제 기준이 틀리진 않았습니다.
수많은 출판사에서 백범일지를 냈지만 돌베게에서 낸 백범일지처럼 이렇게 꼼꼼하게 주석을 달았던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MBC !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되기도 했었지요)
백범일지를 읽으며 새삼 놀랐습니다.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도 의지려니와 더 놀랐던 건 몇 십 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하는
선생의 기억력이었습니다.
논문이 아닌 한 개인의 회고록이기에 사건의 앞 뒤 순서와 날짜가 뒤바뀐 경우가 있지만 그 정황은 다른 이들의
기록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적당히 부풀리거나 꾸며 쓰지 않았다는 증거지요.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자료가 망실된 가운데 백범일지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사를 알게
해주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더불어 조선후기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지요.
일례로 과거시험의 행태라든지 동학농민군의 활동하며 관아가 일제에 의해 어떻게 헐려 나갔는지 등등을
백범일지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백범이란 호가 의미하는 것과 달리 백범은 평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상놈 출신 김구!
당연 엘리트 교육 같은 건 받을 수도 없었죠.
그렇지만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나 고명한 유학자인 고능선은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합니다.
위정척사파의 한 사람으로 당대의 학자였던 이건창과 더불어 강화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김주경은
김구의 구명활동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 놓기도 하지요.
백범일지를 읽으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람은 꼭 자기 그릇만큼의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구의 경우가 그렇지요.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두 차례 청국을 여행하고 인천 감옥에서 탈출해 삼남지방을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은 그야말로 인간 드라마라고 해야 될까요.
김구와 만났던 사람들. 그들 역시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큰 사람들이었던 거지요.
민족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해방정국을 이끌었던 김구!
결국 그는 그가 머물던 경교장에서 육군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은 이미 미군정의 비호아래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현실 속에서 예견돼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대국에 의한 분단과 곧 이어 벌어진 동족간의 전쟁.
그리고 체제를 달리하던 정권에 의해 고착화된 분단...
이 같은 상황아래서 삼팔선을 베고 누워 죽을지언정 분단된 조국에서 살수 없다던 김구의 죽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이른바 좌익진영과 극우세력의 김구에 대한 평가절하였습니다.
사실 누군들 한계가 없겠습니까.
김구에게도 한계는 있었지요.
공산주의에 대한 거의 맹목에 가까운 반대가 그렇고 정치적 노회함에서는 결코 정적인 이승만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백범일지를 읽으며 저는 김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한계는 있었지만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로서 자격은 충분했단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이제 머지않아 김구의 초상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이 10만원권 화폐에 새겨져 나오겠지요.
과문하여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떤가요?
임시정부의 법통과는 무관한 친일세력이 그간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왔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제 때 과거를 청산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의 상징인 김구의 초상이 화폐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친일파의 후예들이 여전히 이 나라 상층부를 점하고 있지만.
백범일지는 한 개인의 기록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법통을 잇는 임시정부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한국전쟁 기간 중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더 소중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임진왜란기간 중 조선군과 일본군의 움직임은 물론 명나라의 움직임까지 살필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자료인 것처럼.
좋은 책을 주위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제 조카 녀석들에게 백범일지를 꼭 한 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데 녀석들은 오늘도 게임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김 구를 비롯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은 틈나는 대로 책을 읽어 자아를 키워나갔는데 말입니다.